PART 4. 옥수수·감자

옥수수와 감자, 대륙을 건넌 작물과 함께 건너지 못한 지식

콜럼버스의 교환은 무엇을 옮겼나요?

작물만이 아닙니다. 옥수수와 감자와 카사바가 아메리카 밖으로 나가고 밀과 쌀과 가축이 들어오는 동안 생물과 병원체, 제국과 노동력도 함께 움직였습니다. 작물이 이동하는 곳마다 권력도 함께 움직였습니다.

PART 4. 옥수수·감자

엔트리 25 — 콜럼버스의 교환: 작물이 바다를 건널 때

1492년 이후 대서양을 건넌 것은 배와 사람만이 아니었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카사바, 토마토, 고추가 아메리카 밖으로 나갔고, 밀과 쌀, 사탕수수, 말과 소가 아메리카로 들어왔다. 앨프리드 크로스비는 생물이 오간 이 흐름을 “콜럼버스의 교환”이라 불렀다(Crosby, 1972). 세계사는 이때부터 사람들이 먹는 음식까지 바꾸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작물이 구대륙에서 힘을 얻은 이유는 낯선 맛 때문만이 아니었다. 옥수수는 열대와 온대 여러 지역에 적응했고, 감자는 추운 고지와 척박한 땅에서도 높은 열량을 냈다. 고구마와 카사바는 가뭄과 나쁜 토양에도 비교적 강했다. 이 작물들은 밀과 벼가 잘 자라지 않는 땅에 들어가 새로운 식량이 되었다. 크로스비가 강조한 것은 이 교환이 생물과 병원체, 제국과 노동력까지 함께 옮겼다는 점이다.

이 이동은 한쪽만 이익을 보는 선물이 아니었다. 아메리카에는 밀, 쌀, 사탕수수, 말, 소, 돼지와 함께 유럽의 토지 제도와 플랜테이션 노동이 들어왔다. 구대륙에는 감자와 옥수수, 카사바가 들어가 산지와 변두리 땅의 식량을 늘렸다. 같은 교환이 어느 지역에서는 먹을거리를 늘렸고, 어느 지역에서는 정복과 질병, 강제 노동을 가져왔다. 작물이 이동하는 곳마다 권력도 함께 움직였다.

새 작물이 힘을 발휘한 이유는 여러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과, 적은 양으로도 큰 열량을 내는 성질에 있었다. 감자는 땅속 덩이줄기에 열량을 저장하고, 옥수수는 큰 이삭에 전분을 모은다. 고구마와 카사바는 뿌리에 저장 조직을 키운다. 이런 성질 덕분에 곡물 농사가 힘든 산지, 모래땅, 메마른 변두리 땅에서도 새로운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작물은 바다를 건넌 뒤에도 그 지역의 토지 제도와 노동, 조리법을 새로 만나야 했다.

옮기기 쉬운 성질도 중요했다. 씨앗과 덩이줄기, 꺾꽂이용 줄기는 배에 실어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작물은 책이나 금속처럼 자리만 옮겨 놓는다고 그대로 자라지 않는다. 토양과 계절을 맞춰야 하고 먹는 법을 익혀야 한다. 또한 독성이나 영양 결핍 문제도 다루어야 한다. 콜럼버스의 교환은 작물이 가진 성질만큼이나 지식의 교환, 때로는 지식이 빠진 채로 벌어진 이동이었다.

콜럼버스의 교환에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는 병원체와 정복, 강제 노동으로 무너졌다. 작물의 이동은 제국의 폭력과 함께 일어났다. 유럽과 아시아 인구가 새 작물의 열량을 얻는 동안, 아메리카에서는 토지와 노동의 질서가 강제로 바뀌었다. 작물이 가진 성질은 식량을 늘릴 수 있었지만, 그 작물이 이동한 길은 곧 권력이 이동한 길이었다.

또한 새 작물이 곧바로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었다. 감자는 독이 있는 식물처럼 의심받았고, 옥수수는 가공법이 빠진 채 퍼지며 영양 문제를 남겼다. 카사바는 독을 없애는 기술이 필요했다. 작물이 가진 성질은 가능성을 열었지만, 조리법과 제도, 사람들의 신뢰가 더해져야 주식이 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PART4의 주제는 “새 작물의 승리”가 아니다. 새 작물은 기존 제도가 먹이지 못하던 사람을 먹이기도 했고, 기존 제도가 만든 약점을 더 키우기도 했다. 감자는 인구를 늘리는 데 도움을 줬지만 아일랜드에서는 오히려 붕괴로 이어졌다. 옥수수는 열량을 줬지만 닉스타말화 과정이 빠지면 펠라그라라는 병을 남겼다. 카사바는 위험에 대비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독을 없애는 지식이 필요했다.

이 교환은 물질이 이동한 사건이면서 책임이 이동한 사건이기도 했다. 누가 재배법을 배우고 누가 위험을 떠안는지에 따라 결과가 갈렸다.

오늘날 김치 속 고추, 이탈리아 토마토소스, 아프리카의 카사바, 유럽의 감자는 모두 이 교환이 남긴 흔적이다. PART4는 그중 감자와 옥수수, 고구마와 카사바가 인구와 기근, 가공법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따라간다.

바다를 건넌 작물은 사람들의 식탁까지 바꾸어 놓았다.

엔트리 26 — 감자와 유럽 인구혁명

감자는 밀이 잘 자라지 못하는 땅에서도 자랄 수 있었다. 추운 기후, 얕은 토양, 작은 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농민에게 이 덩이줄기는 처음에는 낯설고 의심스러운 식물이었지만, 18세기 이후 점점 든든한 식량이 되었다. 다만 감자가 인구를 “만든” 것은 아니다. 감자가 가진 성질이 유럽의 토지, 노동, 전쟁이라는 조건과 맞물려 인구 증가를 뒷받침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네이선 넌과 낸시 치안은 감자 도입이 1700~1900년 구대륙의 인구와 도시화 성장 가운데 상당 부분을 설명한다고 분석했다(Nunn·Qian, 2011). 이 연구는 감자가 자라기 좋은 토양과 기후를 가진 지역이 도입 뒤 더 빠르게 성장했는지를 비교했다. 논문은 감자 도입이 구대륙의 인구와 도시화 증가 가운데 약 4분의 1을 설명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이 수치는 추정치이지만, 감자가 유럽과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중요한 열량 공급원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감자가 퍼진 것은 특히 곡물 농사가 불안정한 북유럽과 고지대에서 의미가 컸다. 작은 땅을 빌려 사는 농민은 밀을 넓게 심을 여유가 없었다. 감자는 밭 가장자리와 집 근처 작은 구획에도 심을 수 있었다. 같은 면적에서 가족이 버틸 열량을 얻을 수 있으면 결혼과 출산, 생존에 관한 계산도 달라진다. 인구 변화는 이런 작은 식량 안정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

감자가 유럽 농가에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열량을 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자는 같은 땅에서 곡물보다 높은 열량을 낼 수 있고, 땅속에 있어 전쟁 중 약탈에서 상대적으로 덜 노출된다. 밀은 이삭으로 익어 들판 위에 드러나지만, 감자는 캐내기 전까지 밭 아래 숨어 있다. 작은 가족농은 감자를 마당이나 변두리 밭에 심어 생존 기반을 보탤 수 있었다. 감자는 국가의 통계에 잡히기 전에 먼저 가정의 식탁에 올랐다.

덩이줄기로 번식하는 방식은 또 다른 장점도 주었다. 씨앗을 따로 거두고 말리는 곡물과 달리, 감자는 일부를 씨감자로 남겨 다음 계절에 바로 심을 수 있다. 조리도 쉽다. 삶거나 굽는 방식만으로 먹을 수 있어 방앗간이나 제빵업자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 밀을 먹으려면 제분소와 빵집을 거쳐야 했지만, 감자는 집안의 냄비만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감자가 퍼진 과정은 작물이 가진 성질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정부의 장려, 군대와 전쟁, 농민의 경험, 가축 사료, 시장 가격이 함께 작용했다.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관리들은 흉년에 대비한 완충 작물로 감자를 권했지만, 농민은 낯선 식물에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감자가 주식으로 자리 잡은 곳은 토지 부족과 빈곤, 기후 조건이 겹쳐 그 작물의 장점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곳이었다.

감자의 장점에는 약점도 함께 있었다. 씨앗이 아니라 덩이줄기로 번식하면 품종이 균일해지기 쉽고, 저장과 운반은 곡물보다 까다롭다. 높은 열량이 가족을 먹이는 동안, 한 가지 품종에 의존하는 위험도 함께 커졌다. 유럽 인구혁명의 뒤편에는 다음에 다룰 전설과 정책, 그리고 아일랜드 대기근의 그림자가 함께 있다.

감자는 그래서 양면적인 작물이다. 전쟁과 추위, 작은 땅에서는 강점이 되지만, 병원체와 장기 저장 앞에서는 약점이 된다. 인구혁명이라는 말은 이 밝은 면을 강조하지만, 감자가 가진 같은 성질이 재난이 일어날 가능성도 함께 만들었다. 작물은 좋은 쪽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제도와 품종 관리가 없으면 장점은 약점으로 뒤집힌다.

감자의 역사는 이 두 면을 늘 함께 읽어야 한다. 열량은 생존을 만들고, 의존은 위험을 만든다.

오늘날 감자튀김은 값싼 간식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작은 밭을 최대한 먹을거리로 바꾸려는 농민의 계산이 있다. 감자가 인구 증가에 기여한 것은 다른 조건과 맞물린 뒤의 일이었다. 많은 열량을 내는 성질과 땅속에 저장되는 성질이 유럽의 제도, 빈곤, 시장과 결합하면서 감자는 인구 증가의 한 축이 되었다.

엔트리 27 — 프로이센 감자 명령 [전설]

왕이 감자밭에 경비병을 세웠다. 농민들은 왕의 밭에 귀한 것이 있다고 여기고 밤에 감자를 훔쳐다 심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둘러싼 감자 전설은 이렇게 전해진다.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이 일화를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이 엔트리는 [전설]이다.

확인되는 사실은 프리드리히 2세가 감자 재배를 장려하는 명령을 내렸다는 점이다. 1756년에 나온 이른바 감자 칙령은 감자 재배를 권했다. 이 칙령은 프로이센이 흉년과 전쟁에 대비해 새 작물을 밀어붙인 사례로 언급된다. 반면 “경비병이 지키는 감자밭” 이야기, 즉 농민의 심리를 거꾸로 이용했다는 일화는 후대 민담에 가깝다. 프로이센 궁정사 연구자 위르겐 루는 프리드리히가 감자를 대중화했다는 신화를 비판해 왔다. 감자는 이미 독일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었고, 대중적 확산은 그의 사후에 더 뚜렷해졌다는 설명이다.

칙령과 전설을 나누어 보면 역사가 더 잘 보인다. 왕은 감자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있던 작물을 식량정책의 대상으로 삼은 통치자였다. 전쟁과 흉년을 겪은 국가는 곡물만으로는 불안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감자는 그 불안을 줄일 후보였다. 경비병 일화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실제 정책은 명령과 보급, 실패와 재시도를 거듭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왜 이런 전설이 생겼을까. 감자는 낯선 작물이었다. 감자는 땅속에서 자라고 꽃과 잎은 먹지 않는다. 게다가 감자와 같은 가지과 식물 중에는 독이 있는 것도 있었다. 농민이 처음부터 감자를 반기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국가가 감자를 권한 이유는 감자가 가진 성질에 있었다. 감자는 척박한 땅에서도 열량을 냈고, 곡물이 흉작일 때 보조 식량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전쟁 중에는 들판의 곡물보다 약탈에 덜 노출되었다.

감자는 또한 세금을 매기기 조금 어려운 작물이었다. 밀과 보리는 들판 위에서 익어 수확기가 눈에 보인다. 감자는 땅속에 머물러 있어 캐는 시점을 농민이 조절할 수 있다. 국가가 감자를 원한 이유는 농민을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흉년에 대비하고 군대 식량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이 성질은 농민에게는 생존 장치가 되었고, 국가에는 식량안보의 재료가 되었다.

그러나 명령만으로 식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씨감자, 조리법, 보관법, 농민의 신뢰, 흉년의 압력까지 함께 필요했다. 왕의 칙령은 제도가 보낸 신호였지만, 감자가 퍼지는 과정은 마을의 경험과 시장, 군사적 위기 속에서 천천히 이루어졌다. 국가가 감자에 주목한 이유는 감자가 가진 성질에 있었고, 제도는 그 성질을 농민에게 강요하거나 설득하려 했다.

전설은 이 복잡한 과정을 한 장면으로 줄인다. 경비병이 서고, 농민이 훔치고, 감자가 퍼진다는 식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이보다 더 느리고 덜 깔끔하다. 프리드리히의 감자정책은 실제로 있었지만, 농민 심리를 거꾸로 이용했다는 도둑질 이야기는 따로 구분해야 한다. 이 구분이 이 엔트리에서 지켜야 할 원칙이다.

감자정책의 핵심은 설득과 행정이었다. 씨감자를 어디서 구할지, 어떤 땅에 심을지, 수확 뒤 어떻게 보관할지를 농민에게 알려야 했다. 농민에게 낯선 작물은 명령문 한 장만으로 식탁에 오르지 않는다. 지방 관리와 목사, 군대와 학교가 새 작물을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국가가 감자 재배를 밀어붙일수록, 감자는 식량안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통치의 문제가 되었다.

오늘도 독일 포츠담에 있는 프리드리히의 무덤에는 감자가 놓인다. 전설은 사실이 아니어도 사람들의 기억을 만든다. 그러나 감자의 역사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재치가 아니다. 국가가 왜 땅속 덩이줄기에 식량안보를 기대했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장의 아일랜드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감자의 장점은 가난한 농민을 살렸지만, 한 가지 품종에 의존하는 것과 저장의 한계가 제도의 실패와 만나면 재난을 키울 수도 있었다.

엔트리 28 — 아일랜드 대기근: 오래 쌓아둘 수 없는 주식의 붕괴

1845년부터 1852년까지 한 섬의 인구가 4분의 1 가까이 줄었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감자에 병이 퍼진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토지 구조와 구호 실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감자는 좁은 땅에서도 높은 열량을 내는 작물이다. 19세기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민은 작은 임차지에서 가족을 먹이기 위해 감자, 특히 럼퍼 품종에 크게 의존했다.

감자는 씨앗이 아니라 덩이줄기 조각으로 번식한다. 이 방식은 빠르고 편리하지만, 품종이 서로 비슷해지기 쉽다. 아일랜드의 럼퍼 품종은 넓은 지역에 심겼지만 유전적으로는 서로 닮아 있었다. 1845년 감자잎마름병, 곧 Phytophthora infestans가 번지자 이 균일성이 약점이 되었다. 1846년 수확은 크게 무너졌고, 1847년은 “검은 47년”으로 기억되었다. 추정 사망자는 약 100만 명이며, 연구에 따라 80만~150만 명 범위로 잡힌다(Mokyr, 1983; Ó Gráda, 1999). 이민자는 100만 명을 넘었고, 1841년 약 820만 명이던 인구는 1851년 약 650만~660만 명으로 줄었다.

감자의 장점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다. 감자는 같은 땅에서 곡물보다 높은 열량을 낼 수 있었고, 땅속에 있어 약탈에 덜 노출되었다. 가난한 농민에게 감자는 생존을 지켜주는 작물이었다. 그러나 수분이 많은 덩이줄기는 곡물처럼 오래 말려 쌓아두기 어렵다. 병이 들면 밭에서 썩고, 저장 중에도 썩는다. 밀 창고처럼 몇 해를 버티게 해주는 저장 수단이 약했다. 감자는 사람을 먹였지만, 감자 한 가지에만 의존한 사회는 병 앞에서 무너졌다.

그렇다고 이 재난의 원인을 병원체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아일랜드의 토지 구조 자체가 취약했다. 다수의 임차농은 작은 땅에 높은 임대료를 부담했고, 곡물과 가축은 시장과 지주 경제에 묶여 있었다. 영국 정부의 구호는 자유시장 원칙과 행정 지연, 가혹한 구빈제 속에서 충분히 작동하지 못했다. 섬 밖으로 식량이 계속 빠져나갔다는 사실은 이 기근을 자연재해가 아니라 정치적 재난으로 보게 만든다.

구호정책의 실패도 감자가 가진 성질과 연결된다. 감자를 대체할 곡물은 수입과 배급망이 필요했지만, 굶주린 농민에게는 그것을 살 돈이 없었다. 공공근로와 구빈원은 굶주림이 퍼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감자는 밭에서 바로 솥으로 이어지는 작물이었지만, 그 길이 끊기자 사람들은 시장을 거쳐야 했다. 시장은 굶주린 사람에게 결코 유리하게 작동하지 않았다.

대기근의 실제 모습은 그래서 숫자보다 더 구체적이다. 집세를 내지 못한 가족은 쫓겨났고, 길 위로 나앉은 사람들은 작업장과 구빈원을 찾아 이동했다. 병과 영양실조가 굶주림 뒤를 따라왔다. 한쪽에서는 배가 식량을 싣고 떠났고, 다른 쪽에서는 감자밭의 검게 변한 잎이 한 해 먹을 것을 사라지게 했다. 병해는 식물에게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굶주림은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일랜드 밖으로 떠난 사람들은 미국, 캐나다, 영국 도시의 노동시장으로 들어갔다. 대기근은 섬 안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기억은 디아스포라, 즉 고향을 떠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기억과 민족주의 기억으로 이어졌다. 감자 농사의 실패는 인구 지도와 사람들의 정치적 감정을 함께 바꾸었다. 작물이 가진 약점이 제국의 정책과 만나면, 식탁이 무너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이민선을 타고 떠나야 했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한 가지 작물만 심는 단작의 위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유전적으로 서로 닮은 품종은 관리와 수확을 쉽게 해주지만, 병원체 앞에서는 집단 전체가 취약해진다. 오늘날 바나나, 밀, 옥수수의 단작을 둘러싼 논쟁에도 이 그림자가 남아 있다. 식량안보는 열량의 양만이 아니라, 실패를 견딜 여유가 있는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감자의 비극은 그래서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효율만 따져 품종과 공급망을 좁히면, 풍요는 어느 날 똑같은 모양으로 함께 무너질 수 있다.

엔트리 29 — 옥수수와 펠라그라

옥수수는 배를 채워 주었지만, 몸에 필요한 영양을 다 주지는 못했다. 20세기 초 미국 남부에서는 피부염, 설사, 치매로 이어지는 펠라그라라는 병이 크게 퍼졌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 병의 원인이 감염이나 독소라고 의심했다. 조지프 골드버거는 식단을 실험하고 여러 기관을 조사해서, 펠라그라가 전염되는 병이 아니라 영양이 부족해서 생기는 병이라는 것을 밝혔다(Goldberger, 1915).

문제는 옥수수라는 작물 자체가 아니라, 옥수수를 다루는 방식에 있었다. 메소아메리카에서는 옥수수를 석회수나 재를 탄 알칼리 물에 삶고 불리는 방법인 닉스타말화가 발달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 껍질을 벗기고 갈기가 쉬워지고, 니아신과 트립토판이라는 영양소를 몸이 더 잘 쓸 수 있게 되어 펠라그라 위험이 낮아진다(FAO, 1992). 그러나 옥수수가 유럽과 아프리카, 미국 남부로 퍼져 나갈 때, 이 가공법은 함께 전해지지 않은 곳이 많았다.

펠라그라의 증상은 흔히 “3D”라는 말로 요약된다. 영어로 dermatitis, diarrhea, dementia, 곧 피부염과 설사, 인지 장애를 뜻한다. 치료하지 않으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미국 남부에서는 1906년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병이 큰 보건 문제였고, 3백만 명 이상이 영향을 받았다는 추정도 있다. 골드버거의 연구 덕분에 사람들은 세균 같은 병원체 대신 식단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는 옥수수 위주의 단조로운 식사가 가난한 사람들과 시설에 갇힌 사람들 사이에서 영양 결핍을 만든다고 보았다.

골드버거의 확신은 극적인 실험으로 이어졌다. 펠라그라가 전염병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1916년 자신과 아내를 포함한 지원자들과 함께 환자의 각질과 분비물을 삼켰다. 이른바 ‘오물 파티’였다. 그런데도 아무도 병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는 세균설이 널리 퍼져 모든 병의 원인을 미생물에서 찾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는 원인이 몸 밖의 병균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부실한 식사에 있다는 것을 자기 몸으로 직접 증명했다. 옥수수에는 잘못이 없었다. 문제는 옥수수만 남기고 나머지 영양을 지운 식단이었다.

옥수수의 위험은 전분은 풍부하지만 니아신이라는 영양소가 몸에 잘 흡수되지 않는 형태로 들어 있다는 데 있었다. 옥수수는 열량을 많이 주는 곡물이지만, 그대로 갈아 먹으면 니아신과 트립토판이 충분히 흡수되지 않는다. 콩류와 함께 먹거나 알칼리 처리를 하면 이 균형이 달라진다. 같은 옥수수인데도 토르티야와 그리츠에서 영양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물이 지닌 성질은 조리법과 만나야 비로소 온전한 식량이 된다.

닉스타말화는 영양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알칼리 처리를 하면 껍질이 느슨해져 갈기 쉬워지고, 반죽의 성질도 달라져 토르티야와 타말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즉 가공법은 맛과 질감, 저장성, 영양을 한꺼번에 바꾼다. 옥수수가 가진 물리적 성질은 조리 기술을 거쳐야 사회를 먹이는 주식으로 완성된다. 이 기술이 빠지면 같은 전분이 오히려 병의 배경이 될 수 있다.

미국 남부의 펠라그라는 가난과도 맞물려 있었다. 면화 중심 경제, 소작제, 낮은 임금, 단조로운 식단은 사람들을 옥수수빵과 당밀, 지방 위주의 식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옥수수는 값이 싸고 저장하기 쉬웠지만, 보완할 식품이 없으면 영양 결핍을 숨긴 열량원이 되었다. 골드버거의 결론은 영양 문제였지만, 그 뿌리에는 빈곤과 토지 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펠라그라를 “옥수수병”이라고만 부르면 절반만 맞는 말이다. 메소아메리카의 옥수수 문화는 닉스타말화와 콩, 호박, 고추를 함께 갖추고 있었다. 반면 미국 남부의 옥수수 식단은 그런 지식과 보완 식품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 곡물의 성질은 같았지만 제도와 가공법이 달랐다.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에서 펠라그라가 줄어든 데에는 식단 변화와 비타민 강화가 함께 영향을 미쳤다. 니아신을 넣어 강화한 밀가루와 더 다양한 식품에 대한 접근이 영양 결핍을 낮추었다. 이 변화도 작물 자체보다는 제도의 문제였다. 영양에 관한 지식이 공중보건과 식품산업에 반영될 때, 같은 탄수화물 식탁이라도 위험은 달라진다.

펠라그라는 작물이 대륙을 건널 때 생긴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다. 옥수수가 대륙을 건널 때 씨앗은 함께 옮겨 갔지만, 가공 지식은 그대로 옮겨 가지 않았다. 전분은 빠르게 퍼졌지만, 알칼리 처리와 균형 잡힌 식단은 일부 지역에서 빠져 있었다. 그 빈 곳을 사람들의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오늘의 강화 밀가루와 영양 표시에는 펠라그라의 기억이 남아 있다. 열량만으로는 식량안보가 완성되지 않는다. 배를 채우는 곡물도 몸이 쓸 수 있는 영양으로 바뀌어야 식량이 된다.

가공법이 생존을 가른다.

엔트리 30 — 고구마와 조선·중국의 기근

흉년에도 살아남을 작물인지 판단할 때는 맛보다 먼저 조건을 따지게 된다. 물이 부족해도 버티는가, 모래땅에서도 자라는가, 짧은 기간에 열량을 낼 수 있는가 하는 조건이다. 고구마는 이런 질문에 비교적 강한 답을 준 작물이었다. 중국 남부와 일본, 조선에서 고구마는 쌀과 밀만으로는 채우기 어려운 부분을 메우는 구황작물로 기억되었다.

고구마는 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작물로, 16세기 이후 필리핀과 중국, 류큐와 일본을 거쳐 동아시아로 퍼졌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후반 이후 남부 지역에서 재배가 늘었고, 산지와 척박한 땅에서도 식량을 얻을 수 있는 기반을 넓혔다. 조선에서는 통신사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접하고 들여온 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확실하게 확인되는 시기는 1763~1764년 통신사가 오간 시점 전후이며, 이후 동래와 제주 등지에서 재배를 시도하는 일이 이어졌다(조엄, 1764; 염정섭, 2006).

조선의 문제는 쌀이 모든 땅에 맞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논농사에는 물이 필요하고, 밭에서 나는 곡식도 계절과 토양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흉년이 오면 나라는 환곡(곡식을 빌려주는 제도)과 구휼(굶주린 백성을 돕는 정책)을 시행했지만, 창고가 비거나 운송이 막히면 사람들은 각 지역에서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야 했다. 고구마는 이런 상황에서 관심을 받았다. 주식 자체를 바꾸기보다는, 흉년으로 주식이 부족해졌을 때 이를 보완하는 작물이었다.

고구마가 구황작물이 된 바탕에는, 메마른 땅에도 잘 적응하는 성질과 뿌리에 저장된 열량이 있었다. 고구마는 뿌리에 전분을 저장하고, 줄기를 잘라 심는 방식으로 번식한다. 씨앗을 기다릴 필요가 없고, 밭 가장자리나 산비탈처럼 척박한 땅에도 심을 수 있다. 쌀은 물이 필요하고 밀과 보리는 잘 갖춰진 밭이 필요하지만, 고구마는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과 자원으로도 먹을거리를 낸다. 그래서 구황작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구마의 단맛도 중요했다. 단맛은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먹기 쉬움과 관련된다. 삶거나 굽는 조리만으로 바로 먹을 수 있고, 말려 저장하거나 전분으로도 쓸 수 있다. 다만 저장 중 썩기 쉽고 추위에 약해, 겨울 보관에는 지식이 필요했다. 고구마의 강점은 재배지에서 나오고, 약점은 저장고에서 드러났다.

그러나 고구마가 기근을 저절로 해결한 것은 아니다. 씨앗이 될 줄기를 보급하는 일, 저장법, 조리법, 지방관의 장려, 농민의 경험이 함께 필요했다. 조선에서 새로운 작물은 낯선 맛과 재배의 불확실성 때문에 곧바로 퍼지지 않았다. 겨울 저장도 쉽지 않았고, 추위에 약한 성질은 널리 퍼지는 데 한계가 되었다. 작물이 실제로 퍼지려면 제도와 지식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했다.

중국에서도 고구마는 인구 압력과 산지 개발, 시장, 이주와 맞물려 있었다. 쌀농사가 어려운 언덕과 변두리 땅에서 고구마는 열량을 더해 주었지만, 그만큼 산림을 개간하고 토지에 부담을 주는 결과도 함께 가져왔다. 구황작물은 생명을 살리는 작물이면서, 더 가파른 땅까지 농사를 짓게 만드는 작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고구마의 역사는 밝기만 하지 않다. 기근을 버티게 해 준 작물은 동시에, 사람들이 더 척박한 지역까지 들어가 살 수 있게 만들었다. 산지를 개간하면 식량은 늘어나지만, 토양이 유실되고 산림이 훼손될 수 있다. 작물이 잘 적응하는 성질은 생존을 돕는 힘이면서, 동시에 개발 압력을 키우는 통로이기도 하다. 제도가 완충 장치를 만들어 주지 못하면, 구황작물도 결국 가난이 미치는 범위를 넓히게 된다.

그럼에도 고구마는 흉년의 시간을 벌어 주었다. 며칠의 식량, 몇 주의 열량이 가족의 이동과 생존을 가를 수 있다. 구황작물의 가치는 바로 그 시간에 있었다.

오늘의 군고구마는 겨울 간식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흉년에 버틸 열량을 찾던 사회의 기억이 담겨 있다. 고구마가 가난을 없애지는 못했다. 다만 고구마가 지닌 성질이 제도와 재배 지식을 만나, 쌀 중심의 공식 기록 바깥에서 식량을 보완하는 장치를 만들어 냈다.

작은 단맛 뒤에 긴 구황의 시간이 있다.

엔트리 31 — 감자와 잉카: 추뇨의 저장 기술

안데스의 밤은 감자를 얼리고, 낮의 햇볕은 얼었던 감자를 다시 말린다. 이렇게 자연이 만드는 냉동과 건조 과정이 합쳐지면 추뇨가 된다. 추뇨는 케추아와 아이마라 공동체가 만든, 얼리고 말려서 만드는 감자 저장 식품이다. 오래 저장하기 어려운 감자의 약점을 고지대의 기후와 사람의 노동으로 극복한 기술이었다.

감자는 오늘날의 남부 페루와 북서 볼리비아 일대에서 7천~1만 년 전쯤 순화된 것으로 설명된다(Spooner 등, 2005). 안데스에는 수천 가지 품종의 감자가 있고, 고도와 추위, 토양에 맞춘 재배 지식이 오랫동안 쌓여 왔다. 잉카 제국은 이런 지역 지식을 도로망, 창고, 노동 동원 제도와 결합했다. 그 결과 추뇨는 병사와 노동자, 이동하는 사람들을 먹이는 저장 식량이 될 수 있었다(Murra, 1980; National Research Council, 1989).

안데스의 환경은 감자에게 까다로우면서도 유리했다. 고도에 따라 밤낮의 온도 차이가 크고, 평지는 넓지 않다. 곡물 중심의 농사만으로는 높은 산지에서 사람들을 먹이기 어렵다. 감자는 자라는 기간이 짧고 추위에 강한 품종 덕분에 이런 공간에서도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감자만으로는 제국이 사람과 물자를 멀리까지 동원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 저장하고 운반할 수 있게 해 주는 추뇨가 필요했다.

감자의 약점은 수분과 전분의 조합에서 출발한다. 생감자는 열량은 높지만 물이 많고 상하기 쉽다. 그러나 안데스 고원에서는 밤의 영하 기온과 낮의 강한 햇볕을 이용해 수분을 빼낼 수 있다. 감자를 얼리고, 밟아 물을 빼고, 다시 말리면 부피와 무게가 줄고 저장성이 커진다. 감자의 약점이 추뇨에서는 운반성과 장기 보존성으로 바뀐다.

추뇨는 식량이 상하기 전 시간을 늘려 주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수확 직후에 먹어야 할 덩이줄기를 몇 달, 때로는 몇 년 뒤에도 먹을 수 있는 식량으로 바꾼다. 무게가 줄어 라마의 짐에 싣기 쉬워지고, 산지에서 해안이나 광산, 공사 현장으로도 보낼 수 있다. 감자의 수분을 빼는 일은 식량을 보존하는 방법인 동시에, 국가가 물자를 옮기는 데 필요한 조건이 되었다.

이 기술은 자연만의 결과가 아니다. 어느 품종을 고를지, 언제 펼칠지, 얼마나 밟을지, 어떻게 씻어 흰 추뇨를 만들지 공동체의 노동이 필요하다. 추뇨는 기후와 작물, 발과 손의 기술이 결합한 식품이다. 잉카 국가가 그것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도로, 창고, 노동세, 키푸 같은 행정 장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추뇨는 감자의 독성 문제와도 연결된다. 일부 안데스 감자는 쓴맛과 독성을 지니고 있지만, 가공을 거치면 이를 줄이고 먹을 수 있는 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 작물이 지닌 성질은 위험과 가능성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가공 기술은 그 위험을 관리하는, 공동체가 쌓아 온 지식이었다.

잉카의 창고는 추뇨만 보관한 곳이 아니었다. 옥수수, 퀴노아, 말린 고기, 직물도 함께 보관되었다. 중요한 것은 감자가 제국을 만든 것이 아니라, 감자를 가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미 있던 노동 동원 제도와 창고 제도 안으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작물의 성질은 행정이 활용하는 재료가 되었고, 행정은 그 성질을 이용해 식량을 멀리까지 옮겼다.

추뇨의 힘은 평상시보다 위기 때 더 선명하다. 서리와 가뭄, 이동과 전쟁이 겹치면 생감자는 금방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말린 추뇨는 창고에 남아 배급될 수 있다. 저장 식량은 제국의 명령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생존도 지킨다. 같은 저장 기술이 지배층과 백성 모두에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쓰인 셈이다.

안데스 사람들은 감자의 품종 차이도 알고 있었다. 어떤 감자는 바로 삶아 먹고, 어떤 감자는 추뇨에 알맞다. 이런 성질의 차이는 어려운 이론이 아니라, 사람들이 손으로 익힌 분류법이었다.

오늘의 인스턴트 감자와 동결건조 식품은 현대 기술처럼 보이지만, 안데스에는 이미 자연 동결건조의 긴 역사가 있었다. 추뇨는 감자가 제국을 만든 증거가 아니라, 감자의 약점이 고지대 제도와 만나 저장 식량으로 바뀐 사례다.

엔트리 32 — 옥수수와 메소아메리카

옥수수는 스스로 씨를 퍼뜨리지 못한다. 야생 조상인 테오신테의 작은 이삭은 사람의 선택을 거치며 굵은 옥수수 이삭으로 바뀌었다. 이 작물은 사람의 손이 있어야만 자랄 수 있었고, 사람은 옥수수의 전분에 의지해서 도시를 만들고 의례를 치렀다.

유전학과 고고학 연구는 옥수수가 약 9천 년 전 멕시코 남부에서 순화되었다고 본다. 특히 발사스 강 유역의 테오신테가 중요한 조상으로 거론된다(Matsuoka 등, 2002; Ranere 등, 2009). 이후 옥수수는 메소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졌고, 마야와 아즈텍 사회에서 주식이자 의례의 중심이 되었다. 사하군이 기록한 아즈텍 세계에서 옥수수는 먹을거리이면서 신성한 존재였다(Sahagún, 1577).

옥수수의 순화는 극적인 변화였다. 테오신테의 작은 씨앗 묶음은 오늘의 큰 이삭과 거리가 멀다. 사람은 더 굵고 잘 붙어 있는 알을 고르고, 다음 해 씨로 남겼다. 이 선택이 반복되며 옥수수는 사람 없이는 번식하기 어려운 작물이 되었다. 옥수수는 성공을 거둔 대신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는 대가를 치렀다.

옥수수가 사람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이유는, 굵은 이삭에 전분을 모으는 대신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옥수수 알은 이삭에 단단히 붙어 있어서, 사람이 수확하고 다시 심어 주지 않으면 널리 퍼지기 어렵다. 대신 한 그루가 굵은 이삭에 많은 열량을 모은다. 말려서 저장할 수 있고, 가루로 갈아 죽과 토르티야, 타말을 만들 수도 있다. 옥수수는 밭에서 곧바로 문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손질하고 가공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밀파는 이런 작물의 성질을 밭에서 실제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옥수수 줄기는 콩이 타고 오를 기둥이 되고, 콩은 흙에 질소를 보태며, 호박은 땅을 덮어 수분을 지킨다. 이 세 작물은 완벽한 조합이라기보다, 노동과 식단을 맞추는 방식에 가깝다. 옥수수의 전분은 콩의 단백질과 만나고, 밭의 이런 구조는 그대로 사회의 식단으로 이어진다.

닉스타말화가 그 핵심 기술이다. 마른 옥수수를 석회수나 재를 탄 알칼리 물에 삶고 불리면 껍질이 벗겨지고 갈기 쉬워진다. 영양 면에서도 니아신과 단백질을 몸이 이용할 수 있는 정도가 달라진다(FAO, 1992). 옥수수가 지닌 성질은 저절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메소아메리카의 조리 기술을 거쳐 비로소 식량으로 완성되었다. 옥수수와 콩, 호박을 함께 심는 밀파 방식도 토양과 식단의 균형을 만들었다.

도시와 조공도 이 식량 체계에 기대었다. 마야와 아즈텍의 도시에는 농촌에서 들어오는 옥수수와 노동이 필요했다. 옥수수는 말려 저장할 수 있었고, 가루와 반죽으로 바꾸어 운반과 조리가 쉬웠다. 그러나 저장 가능한 전분만으로 도시는 유지되지 않는다. 시장, 조공 명부, 의례 달력, 전쟁 포획과 노동 동원이 함께 있었다.

옥수수는 신화 속 언어도 되었다. 마야의 『포폴 부』에는 인간이 옥수수 반죽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옥수수가 생물학적인 주식일 뿐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을 이루는 재료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전분은 몸을 먹이고, 이야기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다. 작물의 성질이 의례를 대신하지는 않지만, 의례가 자리 잡을 수 있는 튼튼한 일상의 바탕을 제공했다.

그러나 마야와 아즈텍의 국가가 옥수수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강우와 지형, 계단식 밭, 시장, 전쟁, 조공, 제사 권력이 함께 있었다. 옥수수는 조공으로 걷히고, 축제에 쓰이고, 도시의 노동자를 먹였다. 작물의 열량과 저장성은 권력이 활용하기 좋았지만, 권력의 모양은 사회 제도가 정했다.

오늘의 토르티야 한 장에는 이 긴 가공의 역사와 사람과 작물이 서로 의존해 온 관계가 남아 있다. 옥수수는 사람의 손을 필요로 했고, 사람은 옥수수의 전분을 제도와 신화로 바꾸었다. 작물과 인간이 서로 의존하는 모습은 여기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엔트리 33 — 카사바와 아프리카

카사바는 굶주림을 막아 주는 고마운 작물이면서 동시에 위험한 식물이기도 하다. 뿌리에는 전분이 가득하지만, 품종에 따라 몸속에서 독성 물질로 바뀔 수 있는 시안배당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서, 날것이나 덜 가공한 상태로 먹으면 독이 될 수 있다. 이런 모순 때문에 카사바는 식량안보와 가공 지식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카사바는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작물로, 16세기에 포르투갈 상인과 식민지 교역망을 통해 브라질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간 것으로 설명된다. 콩고 분지와 서아프리카, 뒤에는 동아프리카까지 퍼지면서 열대 지역의 중요한 주식이 되었다(Nweke, 2004; FAO, 2013). 오늘날 카사바는 열대 지역 탄수화물 공급의 큰 축을 이루며, 나이지리아와 콩고민주공화국 같은 나라에서 특히 중요하다.

카사바가 아프리카에서 중요해진 이유는 곡물과는 다른 수확 방식에 있었다. 옥수수와 수수는 수확기가 지나면 저장고에 들어가지만, 카사바는 뿌리를 땅속에 그대로 남겨 둘 수 있다. 전쟁과 이주, 세금 압박이 있는 지역에서는 이런 성질이 중요했다. 땅속에 있는 식량이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지만, 곡물 창고보다 눈에 덜 띄고 필요할 때 캐서 쓸 수 있다.

카사바가 이렇게 살아남는 힘은, 척박한 땅에도 잘 견디는 성질과 땅속에 저장해 둘 수 있는 성질에서 나온다. 카사바는 가뭄과 가난한 토양에도 비교적 강하고, 수확 시점을 어느 정도 미룰 수 있다. 뿌리를 땅속에 둔 채 필요할 때 캐는 방식은 곡물 창고와는 다른 저장 전략이다. 전쟁이나 시장 불안, 가뭄 속에서 카사바는 마지막 식량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캐낸 뒤에는 빨리 상하고, 독성을 없애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약점은 많은 노동을 요구한다. 카사바는 수확한 뒤 며칠 안에 상하기 쉬우므로, 가공은 수확 직후에 곧바로 이루어져야 한다. 독성을 없애기 위해 갈고, 물에 담그고, 발효시키고, 눌러서 물을 빼고, 굽는 과정이 이어진다. 이 과정은 대개 여성의 노동과 마을에서 전해 온 지식에 기대었다. 카사바가 식량안보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뿌리의 강인함만이 아니라, 그 뿌리를 안전하게 바꾸는 손기술 덕분이었다.

독성은 단순한 결점만은 아니다. 쓴 카사바 품종은 해충과 동물의 피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람에게는 그만큼 가공 부담을 준다. 뿌리의 껍질을 벗기고, 갈고, 물에 담가 발효시키고, 누르고, 말리고, 굽는 과정이 필요하다. 서아프리카의 가리, 중앙아프리카의 푸푸 같은 음식은 이런 가공 지식의 결과다. 작물이 지닌 성질은 위험을 품고 있고, 제도와 기술은 그 위험을 식량으로 바꾸어 준다.

카사바가 널리 퍼진 것은 작물의 강인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노예무역과 식민지 항로, 포르투갈의 대서양 교역망, 아프리카 농민의 선택, 가뭄과 전쟁, 시장 접근성이 함께 작용했다. 카사바는 농민에게 유용했지만, 때로는 식민 경제가 요구한 값싼 생존 식량이기도 했다. 독성을 없애는 지식이 부족하거나 전쟁 때문에 가공할 시간이 줄어들면, 신경에 마비를 일으키는 콘조 같은 질환의 위험도 커졌다(WHO, 1996).

그래서 카사바는 나라의 세금 장부와 잘 맞지 않는 작물이기도 했다. 곡물처럼 한꺼번에 익어 창고에 모이는 대신, 땅속에 남아 있다가 농민의 일정에 따라 캐낸다. 이런 성질은 세금을 걷거나 강제로 징수하는 데는 불편하지만, 가난한 농가에는 완충 장치가 되어 주었다. PART1에서 살펴본 도피 작물의 논리가 여기서도 다시 나타난다. 작물이 지닌 성질은 권력의 눈을 피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식민지 시장을 떠받치는 식량 기반이 되기도 했다.

카사바는 그래서 자유와 위험을 함께 준다. 숨겨 둘 수 있지만, 안전하게 먹으려면 시간과 노동을 바쳐야 한다. 그 균형이 아프리카의 식량사를 바꾸었다.

오늘의 카사바 전분, 타피오카, 가리에는 이 양면성이 남아 있다. 카사바는 가난한 땅의 보험이지만, 보험은 지식과 시간이 있을 때만 작동한다. PART4는 여기서 끝난다. 아메리카 작물들은 세계를 먹였지만, 그 힘은 언제나 제도와 가공법, 노동의 손을 통과했다.

이 장에서 함께 다루는 질문

감자가 유럽의 인구를 늘렸다는 말은 맞나요?

감자가 인구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열량을 내고 땅속에 있어 약탈에 덜 노출되는 성질이 유럽의 토지와 노동과 전쟁이라는 조건과 맞물려 인구 증가를 뒷받침했습니다.

아일랜드 대기근의 원인은 병원체였나요?

병해는 식물에게 일어난 사건이고 굶주림은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덩이줄기로 번식하는 방식이 품종을 서로 닮게 만든 데다 토지 구조와 구호 실패가 겹쳤습니다. 그동안 섬 밖으로는 식량이 계속 빠져나갔습니다.

펠라그라를 옥수수병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문제는 작물 자체가 아니라 다루는 방식이었습니다. 메소아메리카에는 알칼리 물에 삶는 닉스타말화와 콩과 호박이 함께 있었지만, 옥수수가 퍼져 나갈 때 이 가공법은 함께 전해지지 않은 곳이 많았습니다.

카사바는 왜 고마우면서 동시에 위험한 작물인가요?

뿌리에 전분이 가득하지만 품종에 따라 몸속에서 독성 물질로 바뀔 수 있는 성분이 들어 있습니다. 갈고 물에 담그고 발효시키고 눌러 말리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 손기술이 뿌리를 안전한 식량으로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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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이 실린 책

탄수화물 세계사 사전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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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2026년 9월 4일

이 콘텐츠는 저자가 기획하고 AI 도구를 집필·정리 과정에 활용했습니다. 구성, 사실 확인, 표현, 최종 판단과 출판 책임은 저자와 보이드로그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