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미국에서 법 하나가 바뀌었습니다.
연금보호법(Pension Protection Act).
이름만 들으면 지루한 법률 이야기 같습니다. 정치인들이 모여서 논쟁하고, 문서에 서명하고, 그걸로 끝나는 그런 법.
하지만 이 법이 수천만 명의 노후를 바꿔놓았습니다.
핵심은 단 하나였습니다.
“아무것도 선택 안 하면, 자동으로 TDF에 투자된다.”
TDF가 뭔지는 잠시 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아무것도 선택 안 해도”라는 부분입니다.
그 전까지 미국 401(k)는 이랬습니다. 가입하면 “어떤 펀드에 투자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어봤습니다. 선택지가 10개, 20개 있었습니다. 복잡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정을 미루다가,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선택 안 하면 어떻게 됐을까요? 돈이 그냥 현금으로 놓여 있었습니다. 수익률 0%. 수십 년 동안.
2006년 법이 바꾼 건 이겁니다. 선택 안 하면 자동으로 TDF에 투자되게 했습니다. 결정을 미루는 사람도,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도, 알아서 주식에 투자되는 겁니다.
이 한 줄의 변화가 미국인들의 은퇴를 바꿨습니다.
TDF(타깃데이트펀드)란?
은퇴 시점에 맞춰 자동 조정
TDF는 Target Date Fund의 약자입니다. 한국어로 “타깃데이트펀드” 또는 “생애주기펀드”라고 합니다.
TDF의 이름에는 연도가 붙어 있습니다.
- Target Date 2030
- Target Date 2040
- Target Date 2050
이 연도는 뭘까요? 예상 은퇴 연도입니다.
2050년에 은퇴할 예정인 사람은 Target Date 2050을 삽니다. 지금 30대라면 2050 정도가 맞겠죠.
TDF는 은퇴까지 남은 시간에 따라 알아서 자산을 배분합니다.
젊을 때: 주식 비중 높음 (80~90%)
은퇴까지 30년 남았습니다. 시간이 많으니 위험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폭락장이 와도 회복할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식 비중을 높게 가져갑니다.
중년일 때: 주식 비중 중간 (60~70%)
은퇴까지 15년 남았습니다. 여전히 성장이 필요하지만, 너무 큰 위험은 피해야 합니다. 주식 비중을 조금 낮춥니다.
은퇴 직전: 주식 비중 낮음 (40~50%)
은퇴까지 5년 남았습니다. 이제 돈을 지켜야 합니다. 폭락장이 오면 회복할 시간이 없습니다. 채권 비중을 높이고 변동성을 줄입니다.
이 과정이 자동으로 일어납니다.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글라이드 패스(Glide Path)
TDF의 자산 배분 변화를 그래프로 그리면 부드러운 곡선이 됩니다. 이걸 “글라이드 패스(Glide Path)”라고 합니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고도를 서서히 낮추는 것과 비슷합니다.
젊을 때 높이 날다가, 은퇴에 가까워지면서 서서히 착륙합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TDF는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목적지(은퇴 연도)만 입력하면, 경로는 알아서 조정됩니다. 교통 상황(시장 변동)에 따라 경로를 바꿔주기도 합니다. 운전자(투자자)는 그냥 앉아 있으면 됩니다.
왜 TDF가 좋은가?
첫째, 리밸런싱이 자동입니다.
주식이 많이 올라서 비중이 높아지면, 자동으로 일부를 팔아서 채권을 삽니다. 반대로 주식이 떨어지면 자동으로 주식을 더 삽니다. 싸게 사고 비싸게 파는 걸 자동으로 해줍니다.
둘째, 전문 지식이 필요 없습니다.
“주식을 얼마나 가져가야 하지?” “채권이랑 어떻게 섞어야 하지?”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은퇴 연도만 고르면 됩니다.
셋째, “세트 앤 포겟(Set and Forget)”입니다.
한 번 설정하면 잊어버려도 됩니다. 30년 후에 열어보면 알아서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TDF를 고를 때 흔히 하는 실수
TDF는 고르기 쉬운 상품이지만, 그래도 틀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세 가지만 짚겠습니다.
첫째, 연도를 나이로 착각합니다.
“TDF 2045″의 2045는 나이가 아니라 은퇴 예정 연도입니다. 마흔다섯 살이라고 2045를 고르는 게 아닙니다. 2026년에 마흔다섯이라면 예순에 은퇴할 때 2041년, 예순다섯이면 2046년입니다.
계산이 헷갈리면 이렇게 하세요. 현재 연도 + (은퇴 나이 − 현재 나이). 그 값에 가까운 빈티지를 고르면 됩니다.
둘째, 너무 이른 연도를 고릅니다.
불안하니까 앞당겨 고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흔다섯 살이 2035를 고르는 식이죠. 그러면 채권 비중이 실제 필요보다 높아집니다. 안전해 보이지만, 아직 20년이 남은 사람에게는 성장을 포기하는 선택입니다.
셋째, TDF가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2045라도 운용사마다 주식 비중이 다릅니다. 은퇴 시점에 주식을 얼마나 남겨두느냐도 갈립니다.
- 은퇴 시점에 착륙을 끝내는 방식 — 은퇴하는 해에 주식 비중을 최저로 낮추고 고정합니다
- 은퇴 이후에도 계속 낮춰가는 방식 — 은퇴 후 10~20년에 걸쳐 서서히 낮춥니다
어느 쪽이 낫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은퇴 후에도 30년을 더 살 가능성이 높다면, 은퇴 시점에 주식을 너무 많이 줄이는 것도 위험입니다. 11장에서 다룰 문제죠.
상품을 고를 때 투자설명서에서 은퇴 시점의 주식 비중을 한 번만 확인해보세요. 같은 연도인데 40퍼센트인 상품과 20퍼센트인 상품이 있습니다.
그리고 총보수를 보세요. 같은 지수를 따라가는 상품끼리는 이게 사실상 유일한 차이입니다.
“넛지”의 힘
선택 설계가 결과를 바꾼다
2006년 연금보호법의 핵심은 “디폴트”를 바꾼 것입니다.
디폴트(Default)란 기본값입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을 때 적용되는 값입니다.
예전에는 디폴트가 “현금”이었습니다. 선택 안 하면 현금으로 놓여 있었습니다.
새 법은 디폴트를 “TDF”로 바꿨습니다. 선택 안 하면 자동으로 TDF에 투자됩니다.
이게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넛지(Nudge)”입니다.
넛지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라는 뜻입니다. 강제하지 않고, 살짝 밀어서 좋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입니다.
리처드 탈러와 캐스 선스타인이 쓴 책 『넛지』에서 유명해진 개념입니다. 탈러는 이 연구로 201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게으릅니다. 복잡한 결정을 피합니다. 그래서 디폴트를 바꾸면 행동이 바뀝니다.
숫자로 보는 변화
디폴트 변경의 효과는 숫자로 드러납니다.
401(k) 참여율
Vanguard의 2026년 “How America Saves” 보고서에 결정적인 숫자가 하나 있습니다.
- 자동 가입 방식 회사: 참여율 94%
- 직접 신청 방식 회사: 참여율 64%
같은 제도, 같은 혜택입니다. 다른 건 딱 하나, “가만히 있으면 가입되느냐, 가만히 있으면 미가입이냐”뿐입니다. 그 차이가 30%p를 만들었습니다.
전체 참여율도 2025년 말 기준 86%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TDF 선택률
ICI(Investment Company Institute) 자료를 보면, 401(k) 자산 중 TDF 비중은 2006년 3%에서 2022년 31%로 열 배 늘었습니다. 2006년에는 존재감이 없던 상품이 이제는 가장 큰 축이 됐습니다.
주식 투자 비중
EBRI와 ICI가 함께 운영하는 401(k) 데이터베이스를 보면, 전체 자산의 75%가 주식에 들어가 있습니다. 20대는 90%, 60대는 61%. 나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낮아지는 이 곡선이 바로 TDF가 만들어낸 모양입니다.
결론은 명확합니다. 디폴트를 바꾸면 행동이 바뀝니다. 좋은 디폴트를 설정하면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한국 디폴트옵션의 현실
2022년, 드디어 도입
한국에도 디폴트옵션이 도입됐습니다. 2022년 7월부터 시행됐습니다.
미국보다 16년 늦었지만, 그래도 시작했습니다.
제도의 목적은 같습니다.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기본값을 정해주는 것.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해도 어딘가에 투자되게 하는 것.
그런데 결과가 좀 다릅니다.
85%가 원리금보장형
2025년 말 기준, 한국 퇴직연금 디폴트옵션 현황을 보면 충격적입니다.
디폴트옵션으로 운용되는 적립금은 53조 3천억 원입니다. 이 중 45조 5천억 원, 그러니까 85.4%가 원리금보장형에 들어가 있습니다. 은행 정기예금이나 보험사의 원리금보장보험 같은 상품입니다. 가입자 수로 따져도 79%가 이쪽을 골랐습니다.
미국과 정반대입니다.
미국에서는 디폴트가 TDF(주식형)입니다. 한국에서는 디폴트옵션 안에서 다시 원리금보장형이 압도적으로 선택됩니다.
차이가 나는 이유는 셋으로 정리됩니다.
첫째, 손실 회피.
한국 투자자들은 “원금 손실”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주식 하다 망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안전한 걸 선택하고 싶습니다.
둘째, 제도 불신.
“퇴직연금? 그거 회사가 알아서 하는 거 아니야?” 제도 자체를 잘 모릅니다. 신뢰가 낮습니다. 잘 모르니까 안전해 보이는 걸 고릅니다.
셋째, 교육 부족.
복리의 힘, 장기 투자의 중요성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원금보장형 금리 2%와 주식형 기대수익률 7%의 30년 차이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30년 후의 차이
원금보장형과 TDF의 30년 차이를 계산해보겠습니다.
계산해봅시다.
조건: 매달 50만 원 적립, 30년
원금보장형 (연 2% 가정)
- 원금: 1억 8천만 원
- 30년 후: 약 2억 4천만 원
TDF (연 7% 가정)
- 원금: 1억 8천만 원
- 30년 후: 약 6억 1천만 원
차이: 약 3억 7천만 원
같은 금액을 넣었는데, 30년 후 2.5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물론 주식은 변동성이 있습니다. 어떤 해에는 -30%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30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면, 역사적으로 주식이 채권이나 예금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냈습니다.
원금보장형은 “원금”을 보장하지만 “구매력”은 보장하지 않습니다. 물가가 오르면 30년 후 그 돈의 가치는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진짜 위험은 주식의 변동성이 아닐 수 있습니다. 진짜 위험은 인플레이션을 이기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미국이 진짜 바꾼 것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디폴트를 바꿨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어떻게 바꿨는지가 핵심이거든요. 그리고 그 세부가 한국과 미국을 갈랐습니다.
2006년 연금보호법이 만든 것은 QDIA라는 개념입니다. Qualified Default Investment Alternative, 우리말로 옮기면 “적격 디폴트 투자상품”입니다.
이름이 딱딱하지만 뜻은 단순합니다. “디폴트로 쓸 수 있는 상품의 자격을 법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 자격 조건에 결정적인 항목이 하나 있습니다.
예금 같은 원리금보장 상품은 QDIA가 될 수 없습니다.
QDIA로 인정받으려면 주식과 채권에 분산 투자하는 상품이어야 합니다. TDF, 자산배분형 펀드, 관리형 계좌 정도입니다. 회사가 아무리 안전하게 가고 싶어도 예금을 디폴트로 놓는 선택지 자체가 없습니다.
그리고 면책 조항
QDIA에는 짝이 되는 장치가 하나 더 있습니다. 면책입니다.
회사가 QDIA 요건을 지켜서 직원 돈을 운용했다면, 그 결과 손실이 나도 회사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 조항이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직원 노후 자금을 주식형에 넣었다가 폭락장이 오면 어떻게 될까요. 직원들이 몰려와 항의할 겁니다. 소송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럴 바에는 예금에 넣어두는 게 안전합니다. 수익률은 낮아도 욕먹을 일은 없으니까요.
면책 조항이 이 계산을 뒤집었습니다.
“법이 정한 요건대로 했으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 한 줄이 회사가 주식형을 디폴트로 놓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정리하면 미국은 두 가지를 동시에 했습니다.
1. 좋은 선택지만 남겼습니다. 나쁜 디폴트를 아예 불법으로 만들었습니다
2. 그 선택을 한 사람을 보호했습니다.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습니다
넛지는 착한 조언이 아닙니다. 제도 설계입니다.
한국의 디폴트옵션은 왜 다른가
이제 한국을 봅시다.
한국도 2022년 7월에 디폴트옵션을 도입했습니다. 정식 명칭은 사전지정운용제도입니다.
이름부터 다릅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결과를 갈랐습니다.
차이 하나. 원리금보장형이 목록에 들어 있다
한국의 디폴트옵션 상품은 위험 성향에 따라 네 단계로 나뉩니다. 초저위험,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입니다.
퇴직연금사업자는 초저위험 상품, 즉 원리금보장형을 반드시 하나 포함해서 목록을 짜야 합니다.
미국은 예금을 디폴트에서 아예 뺐습니다. 한국은 예금을 디폴트 목록에 넣었습니다.
참고로 OECD 회원국 중에 퇴직연금 디폴트에 원리금보장 상품이 들어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입니다.
차이 둘. 가입자가 직접 골라야 한다
이게 더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미국의 QDIA는 옵트아웃 방식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자동으로 TDF에 들어갑니다. 싫으면 직접 빠져나와야 합니다.
한국의 사전지정운용제도는 옵트인 방식입니다. 가입자가 제시된 목록 중에서 하나를 직접 골라야 적용됩니다.
무슨 뜻일까요.
한국의 디폴트옵션은 디폴트가 아닙니다.
디폴트는 “아무것도 안 했을 때 적용되는 값”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면 디폴트옵션조차 적용되지 않습니다. 골라야 적용됩니다.
2장 처음에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보세요. 사람들이 결정을 미루기 때문에 디폴트가 힘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디폴트를 적용받기 위해 또 결정을 요구합니다.
선택을 없애려고 만든 제도가 선택지를 하나 더 늘린 셈입니다.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
숫자로 확인해봅시다.
| 미국 QDIA | 한국 사전지정운용제도 | |
|---|---|---|
| 적용 방식 | 옵트아웃 (안 하면 자동 적용) | 옵트인 (골라야 적용) |
| 원리금보장 상품 | 불가 | 포함 (초저위험 필수) |
| 기업 면책 | 있음 | 상대적으로 약함 |
| 결과 | 자산의 75%가 주식 | 디폴트옵션 적립금의 85%가 원리금보장형 |
여기에 한 가지 숫자를 더 얹으면 그림이 완성됩니다.
2025년 말 기준 한국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 원입니다. 그중 디폴트옵션으로 운용되는 돈은 53조 원입니다.
전체의 10분의 1 남짓입니다.
제도를 만든 지 3년이 지났는데, 대부분의 돈은 아직 그 제도를 거치지도 않았습니다. 골라야 적용되는 구조이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 53조 원 안에서도 85퍼센트가 원리금보장형입니다.
제도가 있는데 작동하지 않고, 작동한 부분에서도 예금으로 흘렀습니다.
프롤로그에서 던진 질문 기억하시나요. 왜 같은 나라 같은 제도에서 19.5퍼센트와 0.5퍼센트가 갈렸는가.
이제 답할 수 있습니다. 제도가 그렇게 설계돼 있기 때문입니다.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미국을 그대로 따라야 할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공정합니다.
원리금보장형을 디폴트에서 빼는 것이 무조건 옳은가.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미국식 QDIA에는 대가가 있습니다. 은퇴를 앞둔 사람이 폭락장을 만나면 회복할 시간이 없습니다. 2008년에 은퇴를 코앞에 뒀던 미국인들이 실제 그런 타격을 입었습니다. 11장에서 다룰 문제죠.
한국 제도가 안전 성향을 남겨둔 데는 그런 배경도 있습니다.
다만 결과는 냉정합니다. 20대도, 30대도, 은퇴까지 30년이 남은 사람도 예금에 들어가 있습니다. 필요한 사람을 위한 안전장치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기본값이 되어버린 겁니다.
문제는 원리금보장형의 존재가 아니라, 그게 누구에게나 기본값이 되는 구조입니다.
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나
프롤로그에서 만난 세 사람을 이 그림에 얹어봅시다.
지훈(35세)은 입사 후 퇴직연금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디폴트옵션을 고른 적도 없습니다. 앞의 80퍼센트에 속합니다. 은퇴까지 25년이 남았는데 돈은 예금에 있습니다.
현주(45세)는 연금저축 계좌를 만들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지훈보다 한 발 앞섰죠. 그런데 계좌만 만들고 상품을 고르지 않아 예금형으로 3년이 지났습니다. 계좌를 여는 것과 켜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정희(56세)는 사정이 다릅니다. 은퇴가 4년 앞이라 원리금보장형이 아주 틀린 선택은 아닙니다. 다만 정희에게도 자산 전부를 예금에 두는 건 과합니다. 은퇴 후에도 30년을 더 살 테니까요.
세 사람 모두 같은 자리에 있지만, 이유와 해법은 각각 다릅니다.
내 디폴트옵션 변경하기
지금 확인하고 바꾸세요
한국의 디폴트옵션은 자동으로 좋은 선택을 해주지 않습니다. 직접 바꿔야 합니다.
Step 1: 퇴직연금 운용사 앱/사이트 접속
회사마다 퇴직연금 운용사가 다릅니다. 삼성생명, 미래에셋, 신한투자증권 등. 내 퇴직연금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세요. 모르면 인사팀에 물어보세요.
Step 2: 현재 투자 상품 확인
로그인하면 현재 내 퇴직연금이 어디에 투자되어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원금보장형”, “예금”, “GIC” 같은 이름이 보이면 변동성 없는 안전자산입니다. 수익률도 낮습니다.
Step 3: TDF 또는 주식형 펀드 검토
대부분의 운용사에서 TDF를 제공합니다. “TDF 2045”, “라이프사이클 2050” 같은 이름입니다. 내 예상 은퇴 연도에 맞는 상품을 찾으세요.
변경은 앱에서 클릭 몇 번으로 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주의사항
- TDF도 운용사마다 수수료가 다릅니다. 수수료가 낮은 상품을 고르세요.
- 한 번에 100% 바꾸기 부담스러우면, 50%만 먼저 바꿔보세요.
- 폭락장이 오면 무서울 겁니다. 다만 시장이 내렸다는 이유 하나로 충동적으로 전부 팔지는 마세요. 왜 그런지는 8장에서 데이터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시스템이 사람을 바꾼다
이 장에서 배운 핵심은 이겁니다.
좋은 디폴트는 좋은 결과를 만든다.
미국은 2006년에 디폴트를 바꿨습니다. 아무것도 선택 안 하면 자동으로 TDF에 투자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수천만 명이 자동으로 주식 투자자가 됐습니다.
한국은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디폴트옵션이 도입됐지만, 적립금의 85%가 여전히 원리금보장형에 머물러 있습니다.
시스템이 바뀌기를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바꾸면 됩니다.
퇴직연금 앱을 열고, 현재 어떤 상품에 들어가 있는지 확인하세요. 그리고 내 은퇴 시점과 감당할 수 있는 변동성에 맞는지 따져보세요. 10분이면 됩니다.
그 10분이 30년 후 3억 원의 차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장의 핵심
1. TDF는 은퇴 시점에 맞춰 자동으로 자산 배분을 조정하는 펀드다
2. 미국은 2006년에 예금을 디폴트에서 아예 제외하고, 그 선택을 한 기업에 면책을 줬다. 넛지는 조언이 아니라 제도 설계다
3. 한국의 디폴트옵션은 골라야 적용되는 옵트인이고, 목록에 원리금보장형이 들어 있다. 그래서 디폴트가 디폴트로 작동하지 않는다
4. 결과적으로 DC·IRP 자산의 20%만 디폴트옵션으로 운용되고, 그중 85%가 원리금보장형이다
5. 원금보장형과 TDF의 30년 차이는 3억 원 이상이다. 제도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 시간이 흘러간다
다음 장 예고
시스템으로 강제 저축, 자동으로 투자까지.
그런데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세금입니다.
“지금 세금 내고 나중에 면제받을까, 아니면 나중에 낼까?”
미국에는 이 선택을 할 수 있는 계좌가 있습니다. IRA와 Roth IRA.
다음 장에서는 ‘세금을 무기로 만드는 법’을 알아봅니다.


